사랑을 어떻게 해석 할 것인가 - 박일만의 시 「프로파간다」
 박일만  | 2023·06·16 12:40 | HIT : 75 | VOTE : 31 |
사랑을 어떻게 해석 할 것인가 / 김효숙
- 계간《문파》가 읽은 좋은 시 / 박일만의 시 「프로파간다」 -



인공지능이 시를 읽으면서 인간의 마음마저 판별하게 된다면 정념을 세밀히 분류하여 사랑을 정의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때는 지시체가 없더라도 다양한 층위의 정념을 사랑의 범주에 정위하게 될 것이다. 어쩌면 청교도적이거나 혈연관계에서 나온 말, 기표의 순수 관념을 전하는 말이 아니라면 의도성이 짙거나 심지어 어떤 오염물처럼 판단하게 될 수도 있다. 이 시대 사랑의 말이 어느덧 금기어에 근접해 가는 듯하여 염려를 보태는 말이다.
누구든 사랑을 말하는 것만큼이나 사랑을 잘 알지는 못한다. 이것이 해석의 영역으로 넘어 올 때부터 그 속성을 고통이라고 말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사랑은 또 다른 결합물들과 더불어 타자에게 해석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우리의 고통도 가중된다. 사랑의 말을 오염된 말로 해석하면서 진정성을 의심하는 자들의 세계에서 이것은 허언이자 유혹하는 자들의 발언이다. 그들은 이 말을 상대방을 전유하여 자신의 목적을 이루려는 욕망의 발화로 풀이한다. 사랑이 아닌 것들과 결합하여 사랑을 조롱하는 이들은 애초에 사랑의 외부자들이다.
꿈꾸는 식의 사랑이든 ‘하기’의 사랑이든 간에 더러는 위안이거나 더러는 회한인 사랑의 역사 속에 조용히 잠겨 있기 마련이다. 누군가에게는 하기의 사랑이 ‘하라’는 권유로부터 시작될 것이고, 또 다른 이는 맹목으로도, 선량한 천성으로부터도 출발할 터다. 이 계절의 시인이 쓴 미시사에서 이 시대의 사랑법을 읽다 보면 인공지능이 정의할 사랑의 세부 항목들과 이것의 수행방식이 한층 더 궁금해진다.

- 그들, 야성의 종말 -

시인이 “야성”이라고 일침을 놓으면서 이것을 "그들”과 동격으로 보는 사태는 이 시대의 어떤 “프로파간다”에 대한 항거다. 선전․선동 주동자들의 본성을 박일만 시인은 다음같이 압축한다. 그들은 "정신을 말뚝에 묶어 놓아야 시대가 바로 선다고/ 주장하는” 가 하면, “더욱 모범적, 모범적이어야 한다고/ 채찍”을 가하기도 한다. “사랑이란 문화를 좀먹는 거라/규정”하는 그들 때문에 인간은 “표정 잃은 바위가 돼가”고, 동원령이 내려진 그들의 잔치에 수동적으로 참여도 해야 한다. 그렇다면 인간의 맞은편에서 인간 고유의 영역인 자비․사랑을 불순한 것으로 매도하는 그들은 누구인가.


프로파간다 / 박일만


웃음을 감춘 야성
자비나 선정은 반역인 거다
사마귀가 거대한 앞발로 옥죄이듯
한번 잡은 대세를 지키려고 혈안인 거다
그들만의 잔치에 인간들을 동원하는 거다
시대가 꽃을 피우는 꼬락서니를 못마땅해 하고
오직, 경직된 현재만 좇는 거다
자유와 사상과 더불어
그 아무런 실체도 허용하지 않는 거다
정신을 말뚝에 묶어 놓아야 시대가 바로 선다고
주장하는 거다
가끔, 그들이 쳐 놓은 철조망에 걸려
파닥거리게 하는 거다
그들이 허락한 자유란 허울 좋은 전략일 뿐
무참한 세계에 생의 이치를 강제 주입하는 거다
표정 잃은 바위가 돼가는 인간들을 향해
더욱 모범적, 모범적이어야 한다고
채찍질하는 거다
얼굴에 짙은 분장을 하고 사뭇 진지한 몸놀림으로  
사랑이란 문화를 좀 먹는 거라
규정하는 거다

그러므로
그들은 종내 무너지는 거다
인간은 태생적으로 영혼이 자유로운 존재
그 앞에 그들이 무릎을 꿇는 거다
몸은 체제에 억눌려도
사랑은 영원한 거라는 걸 그들이 간과한 거다
야성의 종말은 그런 거다

  - <현대시학, 2023년 3~4월호>


시인의 언어로 추정해 보건대 그들은 사랑의 영원성을 간과한 결과 야성의 종말을 맞는 장본인들이다. "체제”라는 기표 앞에 비워 둔 그 무엇의 정체를 궁금하게 하면서 시인은 그들의 정체를 "그” 앞에 복종하는 자라고 쓴다. 그렇다면 ‘그’는 어떤 체제의 절대성을 지목하는 것일 터다. 그와 그들의 연합 안에서 인간 영혼의 자유는 웃음을 모르는 아성에 압살당해 간다. 자비․선정을 반역행위로 판단하는 그들이 강고한 이성을 자랑하는 자들이라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들의 행태가 화자에게 몰이해를 안기는 이유는 다양하다. 특히 사랑을 "문화를 좀먹는 거”로 규정한 목소리에서 듣게 되는 것은 "선정”조차 반역으로 여기는 그들이 이성의 포로라는 점이다. 정념의 기호들을 용인치 않는 강철같은 이성을 소지해야 하는 필연성에 사로잡혀 더욱 모범적일 것을 강변하는 그들. 이성으로 통합한 그들식 "문화”의 획일화에 강세를 두면서 자비와 사랑 때문에 와해할지도 모를 저들만의 문화를 방어하는 자들이다.

이렇게 박일만은 이성과 감성이 제가기 다른 프로파간다로 작동하는 문화를 시화한다. 한쪽에서는 이성적인 체제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양식을 주입하고. 이 체제의 반대편에서는 정념으로 맞서면서 상대방에게 없(어 보이)는 것을 일깨워 주려는 이가 있다. 화자의 목소리는 이성의 주체들이 발신하는 데시벨 안에 있으나 청취 능력이 전적으로 데시벨의 범주로만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들을 귀는 듣고, 듣지 않는 귀는 마음부터 닫아 버린다. 그런데도 화자는 저러한 프로파간다를 듣고 있으며, 이렇게 듣는 귀가 있기에 저 말에 대항하는 정념도 거세어진다.

감성을 상품화하는 시대에 읽는 [프로파간다]는 이 시대를 넘어 어느 미래까지 상상이 치닫게 한다. 프로파간다를 역설로 새겨들어야 할 필요가 이 시에는 무언으로 들어 있다. 이성의 프로파간다가 전적으로 옳은 것만도, 정념의 프로파간다가 전적으로 이 시대 문화의 본성인 것만은 아니다. "야성”을 "웃음을 감춘” 얼굴로 본 첫 문장부터 다시 읽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웃음을 선물하면 왜 야성이 아닌 감성으로 해석되는지 생각해 보게 한다. 야성이 이성의 다른 이름이라면 이 글의 제목으로 쓴 그들-야성을 그들-이성 또는 야성-이성으로 읽어도 무방하리라.

사랑의 말을 기대할 수 없는 시 세계에서 몇 톨의 씨앗처럼 남아 있는 마지막 사랑의 말을 인공지능이 해석하는 시대가 온다면 어떻게 환영해야 할까. 그때의 시언어야말로 야성-이성의 폭력을 감춘 사랑의 기표는 아닐 것인지. 사랑을 기록하는 일이 곧장 사랑의 폐허를 향하는 일은 아닐지. 따뜻한 사랑의 말이 희소해져 버린 시 세계에서 첨단 디지털 기술로 사랑과 자비를 읽어내야 한다면 그것이 과연 인간의 마음속 정념의 파동을 닮았을 것인지. 해석이 불가능해져서 불구가 되어 버릴 사랑의 해석을 인공지능에게 맡겨 놓아야만 하는 시대가 정녕 빠르게 다가오고 있는 것일까. 챗GPT 열풍을 바라보고 있자니 질문이 많아진다.(김효숙 / 문학평론가)



<계간 『문파』, 2023년 여름호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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