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피아 시인의 좋은 시읽기 - 길고양이 / 박일만
 박일만  | 2022·09·16 13:52 | HIT : 39 | VOTE : 7 |
길고양이 / 박일만


사람들이 떠나간 재개발지구
텅 빈 골목마다 폐허가 즐비하다

문짝이 사라지고 벽만 남은 나의 집은
유기된 목숨들이 죽을 수 있는 유일한 거처

소유권 없는 영토를 주장하며 피어나는
민들레는 이제 무의미해,
이곳에서는 죽음도 오히려 자유롭다

철거가 시작된 지 수개월
포기할 수 없는 목숨을 견디는 일이란 참 난감해
이번 생은 불시에, 통째로 도굴당했다

골목골목 터전을 다지던 낮은 집들을 허물고
마천루를 들일거란
풍문만 오래도록 골목을 떠돈다

삶이 어쩌자고
뼈를 발라먹은 생선 토막처럼 요약되는 것인지

버려진 식당근처에서
재빠르게 먹이를 쫓던
추억의 자세를 취해 본다

포크레인이 위대해 보이던 시절이 있었지
길을 닦고 다리를 놓고 이쪽과 저쪽을 이어주고
정의를 위해서 농성도 했었지

이제 이 거대한 포클레인을
제때 피하지 못하면 짓눌릴 수도 있다는
공포감에 오줌을 지린다

눈이 짓무르고 몸에는 마비가 왔다
지축을 흔드는 굉음에 점점 폐허가 되어 가는
나의 생이 신열을 앓는다

살아남기 위해 부단히 움직여야만 하는 허기가
오늘도 뼛속을 파고드는


출처 : 박일만 시집 『뼈의 속도』

​박일만 시인 약력
-전북 장수 육십령 출생
-《현대시》 신인상 등단
-제5회 <송수권 시문학상> , 제6회 <나혜석 문학상> 수상
-시집 『사람의 무늬』, 『뿌리도 가끔 날고 싶다』, 『뼈의 속도』, 『살어리랏다』 등


이 작품에서 길고양이는 화자가 되어 재개발지구 이야기를 한다. 재개발지구는 고양이에게 “유기된 목숨들이 죽을 수 있는 유일한 거처”이므로, 수개월에 걸쳐 철거 되어 버린 텅 빈 공간은 화자에게는 생을 불시에 도굴당한 느낌인 것이다. 시인은 “포기할 수 없는 목숨을 견디”어야 한다고 표현하는데, 이는 길고양이의 야생적 특성을 묘사하였으며, 마치 고양이를 사람의 감정처럼 내적 심리를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의인화적인 표현은 “풍문만 오래도록 골목을 떠돈다”든지 “삶이 어쩌자고/뼈를 발라먹은 생선 토막처럼 요약되는 것인지”라든지, “정의를 위해서 농성도 했었지” 또는 “나의 생이 신열을 앓는다”등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고양이 화자로 인해 독자는 우리 이웃의 삶 한 자락을 시를 통한 내적 체험으로 경험하게 된다.(시를 읽는 독자에게 내적 체험은 아주 중요하다.) 길고양이와 인간의 객관적이면서도 적절한 심리적 거리가 잘 조율된 박일만 시인의 “길고양이”를 읽게 되어 나도 기쁜 것이다. (감상글 : 수피아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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