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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외 2편 / 원구식
 박일만  | 2014·12·24 11:21 | HIT : 1,012 | VOTE : 171 |
비 / 원구식


높은 곳에 물이 있다.
그러니까, 물이 항상 낮은 곳으로 흐른다는 말은
수정되어야 할 것이다. 물은 겸손하지도 않으며
특별히 거만하지도 않다. 물은 물이다.
모든 자연의 법칙이 그러하듯,
낮은 곳으로 흐르기 위해, 물은
높은 곳으로 올라가지 않으면 안 되었을 것이다.
이 평범한 사실을 깨달은 후
나는 네게 “하늘에서 물이 온다”고
분명히 말할 수 있게 되었다.
너와 내가 ‘비’라고 부르는 이 물 속에서
내가 가장 잘하는 일은
자전거를 타고 비에 관한 것들을 생각하는 것이다.
지금 내리는 이 비는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지금 이 순간 이 비가 오지 않으면 안 될
그 어떤 절박한 사정이 도대체 무엇인가?
이런 것들을 생각하면서 자전거를 타고
하염없이 어디론가 물처럼 흘러가는 것인데,
어느날 두 개의 개울이 합쳐지는 하수종말처리장 근처
다리 밑에서 벌거벗은 채 그만 번개를 맞고 말았다.
아, 그 밋밋한 전기의 맛. 코피가 터지고
석회처럼 머리가 허옇게 굳어질 때의 단순명료함,
그 멍한 상태에서 번쩍하며 찾아온 찰나의 깨달음.
물 속에 불이 있다!
그러니까, 그날 나는 다리 밑에서 전기뱀장어가 되어
대책없이 사물의 이치를 깨닫고 만 것이다.
한없이 낮은 곳으로 흐르기 위해, 물은
자신의 몸을 아낌없이 증발시켜 하늘에 이르렀는데
그 이유가 순전히 허공을 날기 위해서였음을
너무나 뼈저리게 알게 된 것이다.
바위가 부서져 모래가 되는 이유,
부서진 모래가 먼지가 되는 이유,
비로소 모든 존재의 이유를 이해하게 된 것이다.
하늘에서 물이 온다.
우리가 비라고 부르는 이것은 물의 사정, 물의 오르가즘.
아, 쏟아지는 빗속에서 번개가 일러준 한 마디의 말.
모든 사물은 날기를 원하는 것이다.



풀밭에서 금지된 것들  


초록빛은 언제나 나를 무장 해제시킨다.
나는 애인과 함께
신발을 벗고
조심스럽게 풀밭으로 들어선다.
아, 발바닥을 간지럽히는
쾌락의 계집애들.
그 연약한 풀잎 꼭대기까지
물이 올라와 있다.
나는 기꺼이,
시간의 독재자인 물을 받아들인다.
그 속엔 풀의 독이 들어 있다.
애인은 내게 늘 엄마처럼
풀독을 조심하라고 말한다.
그러나 좀처럼 말을 듣지 않는 나는
벌거벗은 채 온몸으로
그 독을 먹고  
서둘러 금지된 물질의 영역으로 들어선다.
일찍이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이다.
생각은 말할 수 없이 단순해지고
걷잡을 수 없는 원시의 본능만이 꿈틀거린다.
물질이여, 너는 불 속에서도 뜨거워하지 않고
물속에서도 질식을 모르니
네가 바로 쾌락이로구나.
슬픔도 기쁨도 애간장을 녹이는 이별도
권력도 계급도 골 아픈 이데올로기도 없으니
내가 진정으로 당도해야 할 해방의 유물론이 바로 너로구나.
애인이여, 성스러운 바람의 매춘부여,
내게 좀 더 강한 풀독을 다오.
오늘은 원시의 본능을 타고
물질이 되고 싶구나.
만용을 부리며
나는 깊은 잠의 늪 속에 빠져든다.
지금 내가 무릎을 베고 누워 있는 이 여인은
일찍이 사랑의 여신이었거나
전쟁의 여신이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녀가 나무 그늘 아래서
풀독을 먹은 애욕의 노예를 위해
이렇게 정성껏 귓밥을 파주며
치유의 노래를 부르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알고 있다, 그녀의 노래가
해와 달이 없던 시절 비탄의 근원이었던
태초의 상처에서 연유하고 있음을.
그리하여 죽은 자를 소생시키는 밤이 오고
하늘에서 별똥이 떨어져
건너편 숲의 머리가 온통 은빛으로 하얗게 빛나는 것을.
순간 시간이 정지되고, 어리석은 나는
벼락같이 깨닫는다, 보잘 것 없는 인간의 육체가 바로
인간이라는 사물의 소중한 기호임을.
죽지 않고 살아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나는 이미 위대한 물질인 것이다. 갑자기 눈앞이 밝아지고
세상의 모든 별이 중심을 잃고
한꺼번에 내게로 쏟아진다.
아, 이제 그만!
나는 소리친다.
하루아침에 진리의 오묘함을 깨닫는 일도
이제 그만!
금지된 물질의 영역으로 들어서는 일도
이제 그만!
경고하건대 이런 것들은 모두
풀밭에선 금지된 것들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나는 계속 소리친다.
그러나  내 몸은 이미
그것을 매우 즐기는 구조로 되어 있다.



아령의 역사


쇠는 왜 녹이 스는가?
의심할 여지없이, 이것은
쇠로 만들어졌다. 오늘 아침 나는 이것을
철거중인 막다른 골목, 연탄재가
수북이 쌓인 전봇대 뒤에서
발견했다. 그리곤 너무 기뻐 소리쳤다.
와, 녹슨 아령이다!
그런데, 쇠는 왜 녹이 스는가?
아령이여,
쇠로 만들어진 것 중에서
네가 가장 인간적으로 생겼다.
너는 쇠의 알통!
누군가 너를 양손에 쥐고
지구를 들어 올리듯
애인을 들어 올리듯
세상을 들어 올렸을 것이다.
그런데, 쇠는 왜 녹이 스는가?
깨진 벽돌과 기왓장 조각들,  
쥐똥들과 고양이 오줌이 지린 막다른 골목에
평행우주가 버려져 있다.
이것은 맨 처음 칼의 손잡이였을 것이다.
칼이 부러져 나가고
달랑 손잡이만 남았을 것이다.
손목이 잘려 나가도
누군가 끝까지 놓지 않은 칼의 손잡이.
기적이다. 모든 쇠붙이가 다 실려 나갔는데
너는 아직 살아남아 이곳에 버려져 녹슬고 있다.




원구식

1955년 경기도 연천 출생.
중앙대 문예창작과와 숭실대 대학원 국문과 석사 졸업.
197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먼지와의 싸움은 끝이 없다> <마돈나를 위하여> 등.
한국시협상 수상.
현재 월간 <현대시>, 격월간 <시사사>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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