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titled Document


청학동에선 길을 잃어도 청학동이다 / 이원규
 박일만  | 2014·12·11 10:49 | HIT : 998 | VOTE : 187 |
청학동에선 길을 잃어도 청학동이다 / 이원규


울지 마라
길 위에서 길을 잃어도 그 또한 길이다
아주 먼 옛날 우리가 오기 전에도
지리산은 그대로 여기 이 자리에 있었으며
아주 먼 훗날 우리가 떠난 뒤에도
섬진강은 마냥 이대로 유장하게 흐를 것이니
너무 촐싹거리며 쟁쟁 바둥거리지 말자

아주 오래 전에 두 마리 학이 날아와 둥지를 틀었으니
쌍계청학 실상백학이라
지리산의 남북으로 청학동과 백학동이 있었다는데
천 년 전의 고운 최치원 선생은
두류산하 청학동에 와서 청학동을 찾지 못하고
아니 찾으려고만 했지 끝끝내 만들지 못하고
남명 조식 선생의 대성통곡은 천왕봉 천석들이 종을 울리고
매천 황현 선생은 절명시 4수를 남기며 자결하고
비운의 산사나이 이현상 선생은 빗점골에서 총을 맞고
우천 허만수 선생은 스스로 지리산의 풀과 나무와 이끼가 되었다
청운 백운의 꿈은 마고할미 천왕할매와 더불어
지리산의 전설이 되고 신화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바야흐로 때가 무르익어
다시 백학 청학의 무리들이 날아들고
고운 선생이 돌아와 형제봉에서 악양동천을 내려다보며
이중환의 택리지를 읽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남명과 매천 선생이 7,250만 개의 싸리 회초리를 가다듬으며
네 이놈들아, 어서 종아리를 걷어라 호통을 치고
화산 이현상 선생이 돌아와 골골이 단풍을 물들이고
우천 허만수 선생이 노고단 천왕봉 케이블카 철탑자리에
심장과 허파와 생간을 내다 걸었으니

아주 오래 전부터 지리산 중에 청학동이 있었고
3천 명의 신선들이 매일 먹어도 쌀이 나오는 동굴이 있었다는데
그 동굴이 거대한 항아리 모양의 악양동천이면 어떻고
화개동천이면 어떻고 또 구례평야면 어떤가
신선의 신(神)은 하늘과 땅의 이치를 보고 아는 사람이요
신선의 선(仙)은 산에 가까이 사는 사람이니
말 그대로 신선은 하늘과 땅의 이치를 아는 산사람이 아닌가

바야흐로 때가 무르익어 지리산에서
농사를 짓고 대봉 곶감을 깎는 사람이 곧 신선이요
녹차를 덖고 밥을 하고 아이를 낳는 선녀
집을 짓고 도자기를 굽고 찻상을 만드는 선남
천연염색을 하고 손두부를 만들고
면사무소 농협 가게로 출근하는 선남선녀
사진 찍고 그림 그리고 시 쓰고 기타 치는 신선들이 있으니
청학동을 찾아 헤매고 헤매다
수처작주(修處作主)라 앉은 자리가 바로 꽃자리니
마침내 날마다 스스로 청학동을 만드는 사람들
그리하여 지리산하 청학비지 바로 지금 여기 이곳에서
두 눈에 핏발이 선 채로
아직 신선이 되지 못하는 사람들만 불쌍한 것이다

하지만 그마저 신선, 아주 잠깐 불쌍한 신선이 아닌가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곳이 청학동이요
이보다 더 나쁠 수 없는 곳도 청학동이니
대체 어디냐고, 청학동이 어디냐고 묻지 마라
아주 먼 옛날 우리가 오기 전에도
지리산은 그대로 여기 이 자리에 있었듯이
끝내 찾지 못한 청학동은 있어왔고
아주 먼 훗날 우리가 떠난 뒤에도
섬진강은 마냥 이대로 유장하게 흘러가듯이
바로 지금 여기 오늘의 잔치 한 마당이 청학동의 현현이니
청학동은 정말로 있었다고 대대로 전해지리니

대체 어디냐고, 청학동이 어디냐고
너무 촐싹거리며 쟁쟁 바둥거리지 말자
청학동에선 길을 잃어도 청학동이다





     
  얼룩말 감정 / 최문자  박일만 14·12·22 674
  흰 바람벽이 있어 / 백석  박일만 14·06·20 7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