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일락
 박일만  | 2021·03·19 06:58 | HIT : 226 | VOTE : 22 |
라일락  / 박일만


새벽,
아파트 입구를 막 나서려다 화들짝 놀랐다
아저씨 저 좀 잠깐 보세요
희미한 빛 속에서 향수냄새 짙게 풍기며
보랏빛 머리로 염색한 여자가 나를 덥석 붙들었다
질겁하며 달아나려는데
발걸음이 영 떼어지지 않는 거였다
어느새 나는 향기에 젖고 빛깔에 눈멀어
거미줄에 걸린 나비처럼 헛발질만 해댔다
가끔 뒤태를 훔쳐보았던 이웃집 여자
지난밤 남편 몰래 치장하고 나가
술집과 노래방을 전전하다 늦어 혼쭐났을 거야
된통 매 맞아 얼굴이 푸르딩딩 하고
맨발로 쫓겨나 화단에서서 밤새웠을 거야
애절한 표정으로 앞을 가로막는 여자, 농염한 여자
측은한 생각에 한참을 붙들렸다 정신을 차리니
해는 중천에 와 있고
계절이 사방에 온화한 융단을 깔아 놓는 거였다
순간, 여자는 사라지고 꽃향기만 나를 감염시켰다
일장춘몽이 따로 없는,
봄, 봄은 병이고 항생제다


<모던포엠, 2021.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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