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물
 박일만  | 2020·12·10 06:31 | HIT : 51 | VOTE : 1 |
끝물 / 박일만


제 몸 곳곳을 갈라 녹색 칠을 하는 지구를 따라
씨앗들도 탱탱하게 빛을 튕기며 솟았지

줄기와 가지를 제멋대로 펼치던 시절
꽃대를 밀어 올렸지
과감한 봄날이었지

피가 끓는 계절 동안 자손을 주렁주렁 달고
긴 장마와 태풍을 건너
손이 부르트도록 노를 저어 지나왔지
미련한 여름날이었지

장마와 태풍의 연대가 끝나자
견뎌낸 꽃나무는 더 이상 열매를 꿈꾸지 않았고
숨을 고르며
머리를 쓰다듬어 옆 나무와 키 재기를 했지

대지를 뚫고 솟아오르던
근육질의 줄기들은 수액을 탕진한 채 마르고
힘에 부치는 나뭇가지들
말라가는 살갗에 주름만 가득 채웠지

텃밭 끝자락 엉거주춤 서있는 아버지
추운 계절 쪽으로 기우는 몸에서는 향기가 나지 않았지
물안개에 젖는 가을날이었지

찬바람이 서리를 두르고 다녀갈 때까지
아버지의 피는 자꾸만 증발해갔지
잘 가거라, 고개만 끄덕였지


<천년의 시작, 2020. 겨울호>
     
  전이轉移 / 박일만  박일만 21·01·23 39
  아버지 목욕을 시켜드리며  박일만 20·11·25 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