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시 배달 - 첫사랑, 나비/ 수피아
 박일만  | 2022·10·19 18:01 | HIT : 15 | VOTE : 2 |
첫사랑, 나비/ 수피아


단어와 단어 사이에서 놀아요
매혹적인 복고풍으로 날갯짓하다가
거실 모빌의 빛을 먹어요
안락한 침대에 누워
홀로 벽에 걸린 잠옷 그림자를 먹어요
욕실 타일의 꽃무늬에 앉아
꽃 모가지를 꺾어간 당신의
슬리퍼에 스민 체취를 먹어요
삶의 인연은 멀기만 하고
현관문은 이제 아무도 기다리지 않아요
2층으로 올라가는 어두운 층계는
당신을 생각할 때면 두근거리던
나의 사춘기를 숨겼어요
아스퍼거증후군에 걸린 소녀처럼
당신의 머리카락/눈/코/입술/가슴을 헤집으며
돌고 돌아 고단해져도 걱정하지 말아요
그리움이 쌓인다 해도, 어둠이 매일
빛에 드러나던 나의 미세한 마음을
안전하게 숨겨 줄 테니까요


【너스레】
누군가가 말했듯이 첫사랑은 역시 이루어지지 않았군요. 혹시나 하고 기대했는데 말입니다. 사랑은 시인에게 다가와 진하게 체취만 남겨놓고 사라졌습니다. 슬픈 일입니다.

그렇다고 시인의 첫사랑 실패가 슬픈 것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찬란하기까지 합니다. 왜냐고요? 시인은 첫사랑이 남기고 간 공간 속에서 나비가 되어 모빌의 빛과 잠옷 그림자를 먹기도 하고, 슬리퍼에 스며있는 사랑하던 사람의 체취를 먹기 때문 입니다.

이와 같이 시인은 첫사랑과 함께 지냈던 공간 속에서 잘 먹고 잘 견뎌내고 있습니다. 슬픔을 슬기롭게 극복하고 있는 셈이지요.

또한, 시인은 첫사랑의 흔적을 재료로 삼아 실내장식을 하고 은밀하게 슬픔을 즐기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시인의 슬픔은 또 다른 모양을 갖춘 사랑으로 승화되어 가고 중입니다.

아울러, 자폐증(아스퍼거증후군)과 닮은 실연의 <아픈 상처>를 치유하는 방법을 떠나간 사람의 전신을 상상으로라도 헤집는 놀이를 통해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잘 노는 것이 슬픔을 잘 참는 원동력 일 겁니다.

어둠이 아무리 빛을 차단한다 해도 시인은 언제나 첫사랑이 발하는 눈부신 빛을 마음속에 머금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시인의 첫사랑이 내내 안녕하기를 기도합니다.(박일만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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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일만 시인
전북 장수 육십령 출생
2005년《현대시》신인상 등단
<송수권 시문학상>, <나혜석 문학상>수상
시집『사람의 무늬』,『뿌리도 가끔 날고 싶다』,『뼈의 속도』,『살어리랏다(육십령)』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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