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시 배달 78 - 등꽃 여자 / 진승범
 박일만  | 2021·12·19 06:26 | HIT : 98 | VOTE : 61 |
등꽃 여자 / 진승범


긴 몸뚱이 휘휘 감고 그녀가 내게 입술을 내민다
보랏빛이다
정신이 아뜩해진 나는 입술 아래 큰 대자로 누워 속살까지 내보인다
그녀 앞에 무장해제다
반항조차 못하는 가엾은 속살 위로 그녀 입술의 그림자가 수를 놓고는
제 솜씨에 흥이 나 노닥거린다

너도 이제 전 같지 않아!
거북이 등딱지처럼 튼 살갗을 놀려대도 팔다리 더 세게 감아오고
갈수록 깊어만 가는 그 입술의 빛깔은 나의 사지를 옭아맨다

마침내 보랏빛 가는 떨림 끝에 그녀의 입술이 열린다
얼마나 오래 기다린 순간인가
불쌍한 중생을 위해 보시하듯
단 침 몇 방울 헐떡이는 내 입술에 흘려주면
눈물 나게 고마운 난, 그 자리에서 자지러지고 만다

그녀에게 동줆貞을 바치고
향내음 가득한 입술 아래 순종을 시작한 것이 언제부터였는지
이젠 기억조차 흐릿하다
그래도 난
그녀 안에 있을 때가 제일 행복하다


【너스레】
착상이 기발합니다. 등나무 아래 누워 굵직한 줄기를 바라봅니다. 뱀이 온몸으로 사냥감을 조이는 듯합니다. 알몸의 여자가 시인의 몸을 휘감아 오는 환상에 젖어듭니다. 등나무 꽃은 5월에 잎과 함께 피고 줄기는 비틀리면서 자랍니다. 그 꽃과 잎 그늘 아래 누워 시인은 나무와 정사를 벌이고 있습니다. 물론 상상입니다. 그녀가 몸뚱어리를 뒤틀며 휘감아 오고 보랏빛 루즈를 칠한 입술로 덮쳐오고 있습니다. 시인은 무장해제 된 몸으로 그녀의 아래 누워서 드디어는 자지러지고 맙니다. 그리곤 아득한 추억 속으로 빠져듭니다. 예전부터 등꽃이 필 때마다 그래왔던 것입니다. 동줆貞을 바친 어린 시절과 기억이 섞인, 이 등나무를 알게 된 때부터이니 아주 오래 전부터의 일인 듯싶습니다. (박일만 시인)


<박일만 시인>
·전북 장수 육십령 출생
·2005년 《현대시》 신인상 등단
·<송수권 시문학상>, <나혜석 문학상> 수상
·시집 『사람의 무늬』, 『뿌리도 가끔 날고 싶다』, 『뼈의 속도』, 『살어리랏다』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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