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시 배달 62 - 가구 / 도종환
 박일만  | 2021·03·18 06:59 | HIT : 4 | VOTE : 1 |
가구 / 도종환


아내와 나는 가구처럼 자기 자리에
놓여 있다 장롱이 그러듯이
오래 묵은 습관들을 담은 채
각자 어두워질 때까지 앉아 일을 하곤 한다
어쩌다 내가 아내의 문을 열고 들어가면
아내의 몸에서는 삐이걱 하는 소리가 난다
나는 아내의 몸속에서 무언가를 찾다가
무엇을 찾으러 왔는지 잊어버리고
돌아나온다 그러면 아내는 다시
아래위가 꼭 맞는 서랍이 되어 닫힌다
아내가 내 몸의 여닫이문을
먼저 열어보는 일은 없다
나는 늘 머쓱해진 채 아내를 건너다보다
돌아앉는 일에 익숙해져 있다
본래 가구들끼리는 말을 많이 하지 않는다
그저 아내는 아내의 방에 놓여 있고
나는 내 자리에서 내 그림자와 함께
육중하게 어두워지고 있을 뿐이다


【너스레】
부부가 오래 함께 살다보면 감정이 습관처럼 무덤덤해진다는 말들을 자주 듣곤 합니다. 이 작품에서도 현대인의 가정생활을 전형적으로 그려내고 있습니다. 말도 없고 몸짓도 하지 않는 가구처럼 그냥 제자리에 우두커니 놓여 살아가고 있을 뿐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시는 대화도 부족하고 애정표시도 적은 부부의 권태로운 삶을 형상화했습니다. 서로의 마음을 열고 들어가도 마땅히 찾을게 없어서 서성이다가 포기하고 나오곤 합니다. 이 부부에게는 뭔가 새로운 탈출구가 필요한 시기가 온 듯합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안심이 되기도 합니다. 이렇게 무심히 살아가는 생의 기저에는 서로에 대한 ‘사랑’이라는 무한한 신뢰감이 깔려 있기 때문입니다. 이 신뢰감은 절대적입니다. 가구처럼 자신의 자리에 고정되어 조용히 살아가지만 서로의 심중을 잘 헤아리고 있습니다. 그것이 근본적인 사랑이자 사람살이 일 것 입니다. (박일만 시인)

<박일만 시인>
·전북 장수 육십령 출생
·2005년 <현대시> 신인상 등단
·시집 『사람의 무늬』(애지), 『뿌리도 가끔 날고 싶다』(서정시학),
       『뼈의 속도』(실천문학)  등
  ☞ <뿌리도 가끔 날고 싶다> 우수 문학도서 선정
  ☞ <뼈의 속도> 송수권 시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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