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시 배달 56 - 여인숙에서의 약속 / 이정록
 박일만  | 2020·12·14 19:21 | HIT : 8 | VOTE : 2 |
여인숙에서의 약속 / 이정록


호텔도 아니고 여관도 아니고
주머니 탈탈 털어 여인숙에 들었을 때,
거기서 내가 솜털 푸른
네 콩 꼬투리를 까먹고 싶어
태초처럼 마음 쿵쿵거릴 때,
슬프게도 나는 농사를 생각했다
묻지도 않았는데, 어머니와 함께
농사짓지는 않겠다고 다짐했다
이제 잠 좀 자자고 옆방에서 벽을 찰 때에도
나는 농사가 싫다고 말했다
네가 꼬투리를 붉게 여미고 살풋 잠에 들었을 때에도
밭두둑 콩처럼 살기는 싫다고
슬픈 억척이 싫다고 나는 말했다
담장이나 울타리를 타고 오르는 완두콩도 싫고
일 잘하려면 많이 먹어야 한다며
며느리 밥그릇에 수북이 콩밥을 푸는
어머니를 떠올리는 것도 몸서리쳐진다고 말했다
여인숙 흐린 불빛 아래에서
나는, 사랑한다는 말 대신에
너와 함께 땅 파는 일은 없을 거라고 말했다
화물 열차가 지나가는
철로변 여인숙이었다


【너스레】
돈이 많지 않은 시절이었나 봅니다. 호텔도 아니고 여관도 아닌 여인숙에 들었다고 하는 군요. 한창 인생에 대한 꿈을 키우던 젊은 시절,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여인숙에 들어 다가올 미래에 대해 다짐을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말했다’고는 하지만 실상은 시인 스스로에게 다짐을 하는 형국입니다. 농촌이 싫다는 겁니다. 농사짓는 일은 없을 거라는 겁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을 어머니처럼 농사나 짓는 여인으로 살게 할 수는 없다는 약속을 합니다. 애인과 결혼을 한 이후에도 농촌을 떠나 도시에서 살겠다는 속마음으로 꽉 차 있습니다. 그러나 땅 파고 농사짓는 일은 없을 거라고 약속하는 시인의 말소리가 지나가는 화물열차 소리에 묻히기를 은근히 바라고 있습니다. 무슨 뜻인지 짐작을 하시겠지요? 철로변 여인숙에서의 일입니다. (박일만 시인)


<박일만 시인>
·전북 장수 육십령 출생
·2005년 <현대시> 신인상 등단
·시집 『사람의 무늬』(애지), 『뿌리도 가끔 날고 싶다』(서정시학),
       『뼈의 속도』(실천문학)  등
  ☞ <뿌리도 가끔 날고 싶다> 우수 문학도서 선정
  ☞ <뼈의 속도> 송수권 시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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