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루나무 / 유종인
 박일만  | 2021·10·14 20:30 | HIT : 12 | VOTE : 2 |
미루나무 / 유종인


바람 불어 길게 휘어지는 미루나무,
허리 아래까지 흔들리며
허공의 화선지 깊이 눌러 써대는 저 필력(筆力)

아무리 휘갈겨 써본들
아무리 파지를 낸들
하늘엔 기러기떼 지나간 흔적도 남지 않는다

태풍이 와 허리가 꺾이고
사철 붓을 쥔 흙의 손아귀 힘이 빠질 때
초록에 단풍을 묻힌 것도 한 필법인가

죽은 미루나무 붓을 씻는 늦가을 저녁비,
초록의 붓털에서
쓰르라미 소리 쏟아지는 여름날이
삭정이 붓털로 빠져 근심하던
까치는 다시 제 집에 꽂아 쓰자고 물어 올리고

마른 우듬지 위에 흰 눈이 묻어온다
허공에선 죽은 나무의 운필이 너무 고요하다
모지라진 미루나무 독필(禿筆)은 불쏘시개로 쪼개진 뒤
아궁이 속 불길로 휘갈겨지는 초서체(草書體)들

지붕에 꽂힌 굴뚝 필봉(筆鋒)에 연기의 필체가 흐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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