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드러운 감옥 / 이경임
 박일만  | 2021·10·07 07:16 | HIT : 15 | VOTE : 5 |
부드러운 감옥 / 이경임


아침, 너울거리는 햇살들을 끌어당겨 감옥을 짓는다. 아니 둥지라고 할까 아무래도 좋다 냄새도 뼈도 없는, 눈물도 창문도 매달려 있지 않은 부드러운 감옥을 나는 뜨개질한다 나는 높은 나무에 매달리는 정신의 모험이나 푸른 잎사귀를 찾아 먼 곳으로 몸이 허물도록 기어다니는 고행을 하지 않는다 때로 거리의 은행나무 가로수들을 바라본다 평소엔 잘 보이지 않던 잎새들의 춤이 바람이 불 때면 햇살 속에서 눈부시다 잎새들은 우우 일어서며 하늘 속으로 팔을 뻗는다 내가 밟아 보지 못한 땅의 모서리나 계곡의 풍경이 나를 밟고 걸어간다 용수철처럼 튀어올라 걸어나가고 싶다

거리에 가로등이 켜진다 가로등은 따뜻한 새알 같다 건물 속에서 사람들이 새어나온다 사람들이 비를 맞으며 가로등 쪽으로 걸어간다 지상에서 버스를 기다리거나 가로등을 지나쳐 지하도 입구 속으로 사라진다 옆구리를 더듬어 본다 하루 종일 허공에 매달려 있던 거미가 기어 나온다 거미의 그물을 뒤져본다 낡은 점자책이 들어 있다 어둠 속에서 나의 뻣뻣한 손가락들이 닳아진 종이 위의 요철 무늬들을 더듬는다 몇 번을 솟아오르다 또 그만큼 곤두박질친 다음에야 희망이란 활자를 읽어낸다 문장들이 자꾸만 끊어진다 길이 좀처럼 떠오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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